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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일기

식물과 함께 살기

아차한 사이에 야래카야자가 또 말라죽었다. 키우기 쉽다고 해서 데려왔는데, 벌써 두 번째이다. 너의 생을 책임지겠다는 그런 거창한 각오로 데려온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빨리 죽어버리니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실내에서 식물을 기르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아끼는 마음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과습으로 죽는다. 물을 너무 적게 줘도 말라죽는다. 통풍시키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직사광선을 오래 쬐어도 죽는다. 생생하던 잎이 노랗게 말라가는 것을 볼 때 조마조마하다. 작은 식물의 죽음이라고 마음이 무덤덤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개입은 식물을 살리고 죽이는데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책임감을 무겁게 느낀 경험이기도 했다.

 식물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은 까다롭다. 하지만 좋은 환경에서는 어떤 존재보다 오래 살 수 있는 것이 식물이다. 얼마 전 다녀온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1100살이나 되었다. 1100살. 인간은 100살까지 살기도 어려운데, 얼마나 오랜 세월 용문사와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었을까. 크고 거대한 은행나무의 연둣빛 잎이 멀리서부터 눈에 가득 들어왔다. 가을이면 바닥에 은행이 수없이 떨어져 비닐을 넓게 깔아 두었다가 수거한다고 한다. 새, 벌레 등 나무에 깃들어 사는 존재들도 아마 많을 것이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맞대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았다. 키가 너무 커져서인지 나무줄기를 끝까지 지지한 철근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번개를 맞지 않도록 나무 옆에 피뢰침을 세워두기도 했다. 나무도 인간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극진한 보호를 받고, 어떤 나무는 무심히 잘려 버려진다. 둘을 나누는 기준은 뭘까? 

 인간 세상의 숲이나 산등 거의 모든 자연에는 인간의 손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원시림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든 틈만 있으면 개발되기 때문이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듯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들이 오히려 인간에게 떠밀려 사라지고 있다. 가리왕산이 그렇고, 비자림이 그렇다. 스키장과 넓은 도로가 생긴다고 한들 과연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뿜는 나무, 무수한 생물들의 삶터가 되어주는 나무보다 가치 있을까. 그 가치를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나이 많은 나무를 옮겨 심는 것보다는 토막 내서 폐기하고 새로운 나무를 심는 것이 돈도 품도 덜 든다고 한다. 경제적인 가치로 평가해 나무를 죽이고 살리는 것을 보면 인간들은 그들을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보내온 세월은 돈으로 살 수 없는데. 식물들도 엄연히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기억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